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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포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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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주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이끌고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아들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와 유팽로, 안영을 모신 사당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헐리지 않은 전남 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며, 1603년 '포충'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 등을 건립하고 옛 사당을 보수했으며, 소장 문적 4종 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금산 전투에 참여한 6,000~7,000명에 달하는 의병 규모에 비해 포충사에 배향된 인원이 적다는 비판이 있으며, 추가 배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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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포충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포충사 정보
포충사 이미지
포충사
이름포충사 (褒忠祠)
국가광주광역시
유형기념물
지정 번호8
지정일1974년 5월 22일
주소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776번지
시대조선시대
수량3동
문화재청 ID23,00070000,24

2. 역사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정기관), 내외삼문,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고, 옛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을 철거하였다. 옛 사당과 동·서재는 본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 4종 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1. 건립 배경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이끌고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1533~1592), 고종후(1554~1593), 고인후(1561~1592) 3부자와 유팽로(1554~1592), 안영(1564~1592)을 모신 곳이다.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 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후 호남 유생들이 충의로운 인물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1603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朴之孝) 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2. 2. 포충사 건립과 변천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이끌고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을 모신 곳이다.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았던 전남 지역 2대 서원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후 호남 유생들이 충의로운 인물을 기리고자 1603년 고경명의 후손과 제자인 박지효 등이 임금에게 청하여 '포충(褒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80년에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정기관), 내외삼문,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고, 이때 옛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옛 사당과 동·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채로 남아있다. 포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문적 4종 9점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배향 인물

포충사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차남 고인후, 유팽로, 안영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장남 고종후 등 5인을 배향한 사당이다.

금산 전투에는 6,000~7,000명의 의병이 참여했으나, 삼부자를 제외하고 유팽로와 안영만이 배향되어 함께 전사한 다른 의병들을 기리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1978년 호국선열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사당을 새로 건립한 후에는 '호남절의록 동순제공사실'에 기록된 의병 28인 외 7인, 총 35인을 추가 배향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경명은 뛰어난 문인이었으나, 1592년 5월 29일부터 7월 10일 전사할 때까지 의병 활동 기록이 전무하다. 반면 조헌을 모신 금산 종용사에는 눈벌 전투에서 전사한 34인의 의병 명단이 비석에 새겨져 배향되어 있다.

3. 1. 주향(主享)

포충사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차남 고인후, 유팽로, 안영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장남 고종후까지 총 5명을 배향한 사당이다.

금산 전투에 참여한 의병은 기록에 따르면 6,000명에서 7,000명에 달했지만, 이들 중 삼부자(三父子)를 제외하고는 유팽로와 안영만이 배향되었다. 이는 당시 함께 전사한 다른 의병들을 제대로 기리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1978년부터 호국선열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국가에서 새로운 사당을 건립한 후에는, '호남절의록 동순제공사실'(같이 함께 전사한 사실)에 기록된 의병 28인 외에 다른 문헌에서 밝혀진 7인, 총 35인을 추가 배향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고경명은 문인으로서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음에도, 1592년 5월 29일부터 7월 10일 전사할 때까지의 의병 활동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반면, 조헌을 모신 금산 종용사에는 눈벌 전투(1592년 7월 10일)에서 전사한 34인의 의병 명단이 비석에 새겨져 있고 배향되어 있다. 종용사에 모셔진 주요 의사는 다음과 같다.

가나다순
고경명, 강염, 고몽룡, 고인후, 고훈, 김덕홍, 김봉학, 김세근, 김신문, 김여정, 류팽로, 박광조, 박광종, 박언신, 박응주, 신건, 안영, 양대박, 양정언, 엄인원, 오응필, 오응현, 이억수, 이인우, 전용관, 정귀세, 조효원, 채희연, 최영수, 최응룡, 최홍립, 최후립, 하정, 한순


3. 2. 추가 배향 논의

광주 포충사는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차남 고인후, 유팽로, 안영 4명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장남 고종후까지 5명을 배향한 사당이다.

금산 전투에 참여한 의병은 기록에 따르면 6,000명에서 7,000명에 달했지만, 삼부자를 제외하고는 유팽로와 안영만이 배향되었다. 이는 함께 전사한 다른 의병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1978년 호국선열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국가에서 새로운 사당을 건립한 후, 《호남절의록 동순제공사실》에 기록된 의병 28인 외에 다른 문헌에서 밝혀진 7인, 총 35인을 추가 배향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편, 고경명은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592년 5월 29일부터 7월 10일 전사할 때까지의 의병 활동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반면, 조헌을 모신 금산 종용사에는 눈벌 전투(1592년 7월 10일)에서 전사한 34인의 의병 명단이 비석에 새겨져 있으며, 이들이 배향되어 있다.
종용사에 모셔진 주요 의사 (눈벌 전투, 1592년 7월 10일, 가나다순)

성명
고경명
강염
고몽룡
고인후
고훈
김덕홍
김봉학
김세근
김신문
김여정
류팽로
박광조
박광종
박언신
박응주
신건
안영
양대박
양정언
엄인원
오응필
오응현
이억수
이인우
전용관
정귀세
조효원
채희연
최영수
최응룡
최홍립
최후립
하정
한순


4. 문화재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1호이다.

5. 평가 및 과제

포충사는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아들들, 유팽로, 안영 등 5명만을 배향하여, 참여 의병 규모(6,000~7,000명)에 비해 배향 인원이 극히 적다는 비판을 받는다. 1978년 정화 사업 이후에도 추가 배향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경명의 의병 활동 기록이 전무한 반면, 조헌을 모신 금산 종용사에는 전사한 의병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대조적이다.

5. 1. 추가 배향 문제

포충사는 원래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차남 고인후, 유팽로, 안영 4명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장남 고종후까지 5명만을 배향한 사당이었다.

금산 전투에 참여한 의병은 기록에 따르면 6,000명에서 7,000명에 달했지만, 이들 중 삼부자(고경명과 두 아들)를 제외하면 유팽로와 안영만이 배향되었다. 이는 당시 함께 전사한 다른 의병들을 제대로 기리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1978년 호국선열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국가에서 새로운 사당을 건립한 후에는, "호남절의록 동순제공사실"에 기록된 28명의 의병과 다른 문헌에서 밝혀진 7명의 의병, 총 35명을 추가 배향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고경명은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592년 5월 29일부터 7월 10일 전사할 때까지의 의병 활동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조헌을 모신 금산 종용사에서는 고경명과 함께 전사한 의병 34인의 명단이 비석에 새겨져 있고 배향되어 있다. 이는 포충사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종용사에 모셔진 주요 의사 (눈벌 전투, 1592년 7월 10일)

가나다순
고경명, 강염, 고몽룡, 고인후, 고훈, 김덕홍, 김봉학, 김세근, 김신문, 김여정, 유팽로, 박광조, 박광종, 박언신, 박응주, 신건, 안영, 양대박, 양정언, 엄인원, 오응필, 오응현, 이억수, 이인우, 전용관, 정귀세, 조효원, 채희연, 최영수, 최응룡, 최홍립, 최후립, 하정, 한순


5. 2. 역사적 재조명

포충사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그의 차남 고인후, 유팽로, 안영 4명과,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 장남 고종후까지 5명만을 배향한 사당이다.

금산전투에 참여한 고경명을 비롯한 의병은 6,000명~7,0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부자를 제외하고는 유팽로, 안영 두 사람만을 배향했을 뿐, 함께 했던 6,000~7,000명의 의병에 비해 배향된 인원은 매우 적다는 비판이 있다.

1978년부터 호국선열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국가에서 새로운 사당을 1980년에 건립하면서, 《호남절의록 동순제공사실(湖南節義錄 同殉諸公事實)》에 기록된 의병 28인 외에 다른 문헌에서 밝혀진 7인과 35인을 추가 배향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다.

고경명은 문인으로서 글재주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592년 5월 29일부터 7월 10일 전사할 때까지의 의병사 일기나 의병사록(義兵史錄)의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편, 조헌을 모신 금산 종용사에는 눈벌전투(1592년 7월 10일)에서 전사한 34인의 의병 명단이 비석에 새겨져 있으며 배향되어 있다.

종용사에 모셔진 주요 의사 (눈벌전투, 1592년 7월 10일, 가나다순)
고경명, 강 염, 고몽룡, 고인후, 고 훈, 김덕홍, 김봉학, 김세근, 김신문, 김여정, 유팽로, 박광조, 박광종, 박언신, 박응주, 신 건, 안영, 양대박, 양정언, 엄인원, 오응필, 오응현, 이억수, 이인우, 전용관, 정귀세, 조효원, 채희연, 최영수, 최응룡, 최홍립, 최후립, 하 정, 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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